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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1. 희망하며 기다리다

 

성토요일은 기다리는 날이요, 희망하는 날입니다.

온 세상이 기다리는 느낌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설령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를 때도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은 곧 기다림입니다.

젊은 아가씨나 청년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거나 성소를 기다립니다. 또 공부를 마치고 일자리를 기다립니다. 혼인한 이는 아이를 기다리고, 자녀가 크기를 기다리고, 나이 든 이는 죽음을 기다립니다. 무엇이 되었든 모두 기다림 중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립니다. 마리아님이 예수님을 안으십니다.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서 사흘을 기다리기 전, 마지막으로 마리아님께 맡겨집니다.

마리아님은 기다리십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십니다. 그러나 평화로이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사흘 후에 다시 일어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님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십니다. 라자로처럼 다시 깨어나시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달리 무언가가 이루어지리라는 뜻인지… 마리아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사도들도, 제자들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저마다 다릅니다. 

 

기다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평화로이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순간에 공동체는 갈라지고, 구성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서로에 대한 인내심 없이 공격하고 지나친 행동을 하곤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봅시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공동체 내부에 생겨난 긴장을 견디지 못한 듯합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기다리는 것에 그들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안절부절 못합니다. 안식일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무덤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시신 곁에 있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싶습니다. 갈 수 있게 되자마자 달려갑니다. 그러나 불행하고 근심에 찬 듯합니다. 웁니다. 천사들에게 호소합니다. 불안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님은 꼼짝하지 않으십니다. 무덤으로 달려가지도 않으십니다. 무덤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떠합니까? 제자들이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여인들은 서둘러 와서 천사들을 보았노라고, 주님이 부활하셨노라고 전했습니다.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히스테리로군. 아무 말이나 하다니. 너무 괴로워서 정신이 나간 게지…. 

 

시련 속에 있을 때 기다림은 몹시 힘겹습니다. 불안하고 사건을 왜곡하게 되고 무언가를 성급하게 하려합니다. 단지 불안을 잠재우고, 자신을 점점 더 사로잡는 엄청난 에너지를 분산시키려고 목적도 없이 격한 행동으로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일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도망칩니다. 피합니다.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채 있지 못하고 아무것도 그대로 두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 가운데 꼼짝하지 않고, 기도하고 봉헌하는 자세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사건이나 사물이나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기다릴 줄 아는 은총을 예수님께 청해야 합니다. 이해하고 싶고, 알고 싶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인간…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곧장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리아님은 신뢰하고 확신하며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대로 다시 일어나실 것을 믿고 계십니다.

마리아님과 요셉이 불안해하며 사흘을 찾아 헤맨 후, 어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으셨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복음서는 요셉과 마리아님이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깊이 새겨 왜 간직하였습니다.(루카 2.19, 52)

 

이해 못할 일도 많습니다. 그래도 때로는 빛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꼼짝 않고 머무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할 일을 다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님은 시련 가운데서 우리에게 기다림을 가르치십니다. 상처와 약함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상처와 약함에서 오는 시련 앞에서 부활을 믿고 확신하며 기다리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부활은 시간을 통틀어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고 겸손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부활에 담긴 겸손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부활의 겸손함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건을 꿈꿉니다. 눈길을 끌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지나시며 보여 주시는 겸손함을 삶에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늘 겸손하게, 단순하게 ‘솔솔 부는 바람’처럼 지나가십니다. 믿음이라는 신비 안에서 늘 그렇게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때, 대낮에 예루살렘 성전 위에서 군중 앞에 우레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당신을 얼른 알아보지 못하는 몇 사람에게 소박하게 나타나십니다.

 

부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께서 주신 이 선물은 단숨에 우리를 변모시키지 않는, 갑작스럽게 변화시키지 않는, 매우 작고 겸손한 부활입니다. 약하고 상처 난 땅, 우리라는 존재에 깃든 조그마한 씨앗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깨지기 쉽고 허약한 곳에 성령을 받아들이면 그분은 아주 작은 씨앗으로 거기에 계시고, 그 씨앗은 조금씩 자라나 우리를 변모시킵니다.

 

우리는 부활한 이들이고, 기다리던 부활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 장 바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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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2. 우리를 위해 다시 일어서신 분

 

부활, 그것은 늘 ‘그들이 일어서는’ 바로 그때,

거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향해 새롭게 일어난다면

그것이 부활입니다.

우리가 어둠에서 새로운 삶으로 일어난다면,

우리가 새롭게 자신을 추슬러 일어난다면

그것이 부활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십자가와 걸림돌을 딛고,

하늘을 향해 나아가고, 하느님께 우리 시선을

돌린다면 그것이 부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신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삶에 성금요일 같은 날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절은 우리가 그럼에도 삶이 그렇게 될지라도

살아갈 것이라는, 그리고 그때의 삶은 다른 삶이

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의 삶은 모든 십자가 죽음에도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삶,

죽음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삶,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입니다.

 

그때의 삶은 우리가 살 수 있고,

살아가도록 허락받은 삶입니다.

그분께서 이미 우리의 모범이 되셨기에,

우리 삶의 모든 성금요일을 아시고

그 성금요일을 이미 사신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부활하신

그 하느님을 우리는 믿기에….

 

부활, 이는 ‘삶을 위해 다시 일어서자!’라는

복음입니다. 우리를 위해 다시 일어서신 분,

그분이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기에….

 

                              - A. 슈바르츠 -

 

 

 

기도

 

부활이신 주님,

당신은 우리들 하나하나와 함께가고 계십니다.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우리의 마음을 원하면서

당신은 우리를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고독의 심연에서 신음하고 있음 때에도

당신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하고

당신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순간순간 당신을 따르려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은 언제나 새로워야 하며

실천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런 선택이 없으면 우리는 질질 끌려가는 것입니다.

당신을 선택 한다는 것은

당신의 이런 목소리를 든는 것입니다.

“너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느냐?”

 

                                  - 로  제 -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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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야 고마워

 

우리를 흔들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어떤 것에 우리의 삶이 

달려 있다는 걸 가르쳐 주어서 고마워

우리가 지금까지 살며 누렸던 사치스러움, 물질적 풍요로움, 자유, 건강에 대해

깨닫게 해주어서 고마워

그리고 우리가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줘서 고마워

 

우리를 멈추게 해주어서 고마워

그래서 우리가 바쁨 속에서 길을 헤매느라 가장 기본적인 것에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 같았던 그 문제들이 사실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줘서 고마워.

 

교통의 흐름을 멈추어 줘서 고마워

지구는 아주 오랫동안 환경오염을 좀 돌아보라고 우리에게 애걸하고 있었지.

우리 듣지 않았어.

이 모든 두려움을 주어서 고마워. 두려움은 오랫동안 정말 지구적인 질병이었지.

근데 그 사실을 직시하려 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어.

 

이제 우리는 그걸 똑바로 마주 봐야 해

사랑으로,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 도와주면서 두려움을 감싸 안는 법을 배워야 해

이렇게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

드디어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됐어.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우리를 묶어 하나로 만들어 줘서 고마워

우리는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아주 처음부터 새로운 세계를 세울 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주어서 고마워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부입니다.

그건 우리 사이에,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 모두를 묶어 왔습니다.

신체적으로, 에너지적으로

감사의 마음은 면역체계를 강화시키는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해 줍니다.

어떤 관점을 선택할 건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관점을 다 알고 있으면 제일 좋은거죠.

감사하라. 깨어 있어라.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이전 같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지금 변화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야 고마워"

 

성토요일 영상1_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mp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