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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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1. 육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삶, 구원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따라죽고 싶어 몸부림치던 때가 엊그저께 같것만도 따라죽고 싶은 비통과 절망의 극치가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릴 것을 생각하면 인생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배반감을 느낀다. 어찌 고통뿐이랴, 내 마음속에 영원처럼 각인된 사랑의 순간, 그것 때문에 태어난 양 믿어 의심치 않던 삶의 비의도 결국은 소멸하는 것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될 것을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은 몸일 뿐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다 만날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먼저 간 사람과 같은 곳으로 간다는 건 아마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곳이 허(虛)든, 무(無)든, 신의 섭리든 간에 그곳으로 비상을 하든지, 추락을 하든지, 빨려들든지 할 것이다. 설사 그 순간에 우레와 같은 깨달음이나 쾌감이 예비돼 있다고 해도, 느낀 것을 기억하고 표현할 수 있는 육신이 없는 대오각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죽음이 무서운 것은 기억의 집인 육신이 소멸한다는 절대로 변경될 수 없는 사실 때문이고, 내가 육신에 집착하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영혼이 있으면 뭐 하나, 육신이 없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알아보나 싶어서이다.

 

육신에 대한 찬탄 없는 첫사랑의 기쁨을 말한다면 그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다. 서로 끌리고 사랑하여 결혼한 남자에 대한 내가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한 건 근육질의 몸이 아니라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이었노라고 말할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 눈빛, 그 미소가 아니었다면 그런 좋은 심성이 무슨 수로 겉으로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눈빛도 미소도 육신에 속한 게 아니던가.

 

내 속으로 난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몸이 생겨날 때 나는 게울 것 같은 이물감을 느꼈고, 점점 부풀어 심장까지 차오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죽을 힘을 다해 내 몸으로부터 떼어냈다. 내 몸의 진액을 짜내어도 짜내어도 고 작은 것은 허기져 했고, 날마다 포동포동 살이 찌는 내 새끼를 내 손으로 씻기면서 날로 굳세고 아름다워지는 몸을 보면서 느낀 사랑의 기쁨을 무엇에 비길까, 그런 내 새끼 중의 하나가 몸의 절정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이 세상에서 돌연 사라졌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미치지 않고 견딜수 있었던 것은, 나도 곧 뒤따라가게 될 테고, 가면 만날걸,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만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건 포옹도 오열도 아니다. 때려주고 싶다. 요 놈, 요 나쁜 놈, 뭐가 급해서 에미를 앞질러 갔냐 응? 그렇게 나무라면서 내 손바닥으로 그의 종아리를 철썩철썩 때려주고 싶다. 내 손바닥만 아프고 그는 조금도 안 아파하고 싱글 댈 것이다. 나는 내 손바닥의 아픔으로 그의 청동기둥 같은 종아리를 확인하고 싶다.

 

나는 내 새끼들을 때려 기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심하게 때린 기억이 몇 번 있다. 밖에 나가 놀고 있으려니 한 아이가 끼니 때가 지나도 안 돌아오고, 동네방네 찾아나서 보니 동무들은 다 집에 있는데 그애만 안 보인다. 해는 져서 어둡고 온갖 방정맞은 생각으로 마음속이 지옥이 돼 있을 때, 그애의 모습이 저만치 보인다. 실루엣만으로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게 바로 피붙이의 징그러움이다. 달려가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냐고 다짜고짜 때리기부터 한다. 내 손바닥의 아픔으로 내 새끼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타들어가던 애간장이 스르르 녹게 된다.

 

저 세상에서 내 새끼와 다시 만날 때도 그러고 싶은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엑스터시 상태를 경험한다. 그러나 최고의 엑스터시도 육신을 통하지 않고는 이르를 수 없는 걸 어이하리.

 

                                                        - 박완서 -

 

 

 

묵상2.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라.

 

요한 복음은 복음서 시작부터 끝부분까지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요한 1,1)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계시하기 위해 세상에 온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사신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셔서 인간사에 엮이어 살으신 분이시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삶의 가장 낮은 곳의 모든 것을 직접 겪은 것은, 고통에 찬 우리네 인간 삶의 모든것이 다 하느님 안에서 의미있음을 알게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생명을 되찾아 구원의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함 이었다.

 

하느님은 예수의 몸을 통해 세상에 계시되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예수님의 몸에 있었던 고통과 죽음의 물리적 모습을 전해준다. 예수는 빰을 맞고, 조롱 당하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 위에서 목마름을 외친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십자가 위의 죽고 당신 사명을 완수한 예수의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다. 예수가 몸으로 보인 하느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은 결코 추상적인 말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바치는 예수의 몸을 통해서 드러났다.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하느님의 강력한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7-29)

 

요한복음에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차원을 넘어서 영적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가있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스승 예수임을 알아 보았을 뿐아니라, 예수의 몸에 난 상처가 당신을 배반했던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의 상처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십자가의 폭력과 죽음을 이겨낸 사랑의 상처였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마르 14,22-24)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을 바라본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일들을 기억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가시는 그분의 발길, 병든 이들의 몸을 만지시는 그분의 손길, 빵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모습,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모습, 십자가에 못박혀 메달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몸, 십자가 위에서 내려져 무덤에 묻히신 그분의 몸, 그리고 사흘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 몸에난 상처를 보여주시며 평화를 되찾아 주시는 모습을 기억 한다.

 

매 미사 때마다 주님의 몸인 성체를 두손에 직접 받아 만지고 먹는 우리들 모두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어야 한다. 자신의 몸을 필요로 하는 곳에 내어 주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어려운 상항에 처한 가족을 돌보는 일에, 병원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 곁에, 일터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동료에게 귀 기울이는 일에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비록 토마스처럼 주님을 직접 뵈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체를 받아 모시는 그 순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고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 .

 

토마스가 주님께 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 세상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 하느님의 살아있는 모상 이라면,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인 이라면,

그렇다면 여러분의 손을 좀 보여 주세요.

여러분의 발을, 여러분의 옆구리를 좀 보여 주세요.

여러분의 삶에 대한 모든 관심과 활동들 안에

예수님께서 몸에 지니셨던 것과 같은 상처를 여러분은 몸에 지니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토마스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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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베니고로드의 구세주, 루블료프 作

 

 

 


기도. 일치를 목말라하시는 주님

 

                              - J. 갈로 -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
인류를 사랑 안에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
모든 장애를 극복하여 일치를 이루도록
우리의 작은 희생을 당신의 희생과 합쳐
성부께 바쳐주십시오.
인류가 평화를 갈망하게 해주시어
전쟁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서로 모르는 사람과도 허물없이 사귀며
싸움을 그치고 손을 맞잡고
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불화나 미움, 복수가 있는 곳에 오시어
화해하고 화목해지게 이끌어 주십시오.
야심으로 불타며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시어
이해의 마음이 싹트게 하시고
서로가 받은 괴로움과 무례를
잊게 해주십시오.
사랑과 온유의 씨를 우리 마음에 뿌리시어
마음의 무장을 풀게 해주십시오.

 

주님,
일치를 위한 작은 노력들을 축복하시어
우리를 하나로 뭉쳐주십시오. 아멘.

 

 

 

Ave Verum Corpus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진정한 성체가 나심을 경배하나이다.
모진 수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 것,
뚫린 가슴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네,
우리가 죽을 때에
그 수난을 기억하게 하소서.
오 좋으신 예수님, 오 자애로운 예수님,
오 마리아의 아들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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