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1. 향유 부은 여인 이야기 (마르 14,3-9)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일을 했습니다.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 바르는 일을 앞당겨 한 것입니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마르 14,9)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되리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난 초대받지 않은 한 여인의 등장과 행동은 모두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남성 제자들만이 둘러 앉은 곳에 돌연히 나타나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니. 그것도 남자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옛날부터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은 예언자가 왕을 임명할 때 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이 여성은 옛날처럼 군림하는 왕으로서가 아니라 수난당하며 처절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는 수난의 메시아, 예수에게 향유를 붓고 있다. 죽음을 예감하며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 바르는 일을 앞당겨 했다’는 예수의 말씀처럼, 예수가 가야 할 고난의 길에 이 여인은 어떻게든 자기의 사랑을 표현했다. 이 여인의 마음을 느낀 예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마르코 복음(14,3-9)와 마태오 복음(26,6-13)에서 향유 부은 여인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 부분에 들어 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이 이야기의 조금 앞에는 세 번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8장-11장)와 예루살렘 입성(11장) 부분이 나오고, 바로 앞에는 과월절 이틀 전에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는 대제관들과 율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를 배반하기로 계획하는 유다의 이야기이다. 제자들의 배반 이야기가 연이어 계속되는 이야기의 전체 구성에서 드러나듯, 예수에게 닥칠 수난의 운명에 함께하는 마음으로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이 여인의 행동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던져주고 있다.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수난에 대해 예고할 때 예수를 인간적인 정에서 붙잡아 놓으려고 하거나(마르 8,31-33)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 하며 자리 다툼을 하는 모습(마르 9,33-35), 예수가 영광스럽게 될 때 한 자리씩 달라고 간청하는(마르 10,35-40) 남성 제자들의 모습은 사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늘 따라다니는 유혹들이다. 스승 예수를 믿고 따르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약함이 가져오는 다양한 유혹들……. 그러한 유혹에 걸려넘어지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죽음을 앞둔 예수에게 다가온 ‘때’를 알아차리고, 그분의 고통스런 마음에 함께 했던 향유 부은 여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끝까지 동참했던 ‘십자가 곁의 여인들’과 함께 진하게 다가온다.

 

비록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게 되리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수난당하고 죽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가는 길에 동참하고 그분이 맞아야 할 죽음의 ‘때’를 미리 알아차려 진정 그분이 어떤 분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 이 여인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묵상2. 향유 부은 여인 이야기 (요한 12,1-11)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7-8)

 

수난이 다가올 무렵, 예수께서는 당신을 닮은 두 여인을 만나신다. 성전의 봉헌궤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동전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와 베다니아의 마리아가 그 두 여인이다.

 

기부한 것이 동전 두 닢이든 혹은 삼백 데나리온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두 여인이 보여 준 행동의 공통점은 둘 다 전부를 바쳤다는 데 있었다. 어느 누구도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바쳤다고 해서 낭비한다고 책망하지 않았다. 그 가치가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동전 두 닢은 하느님의 보고(寶庫)에 바쳐진 그 과부의 전부였다.

 

마리아의 향유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는 손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조금만 부어서 축제의 분위기를 띄울 수도 있었다. 그 정도만 했어도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만찬에 참석한 이들이 두 여인을 비난한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과장과 낭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 행위의 이유를 이해하신다.

 

이 낭비 행위는 사랑의 양적 측면에 대한 표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사랑의 논리는 계산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를 다 내어준다.

 

 

 

“사랑은 다 주는 것,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연이 사랑인 것은
자기가 가진 모두를 주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

 

오, 하느님. 영이신 당신! 당신께 청하오니
우리의 모든 행동이
당신의 영감에 따라 이루어지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손길로 순화되게 하소서.

 

하여 우리의 모든 기도와 일이
항상 당신에게서 시작하여 당신에게서 끝나게 하소서.

 

하느님, 저의 하느님,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찾을 수 있나이다.

 

사랑 안에서,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이 영혼의 문이 열려,
자유롭고 맑은 공기를 숨쉬게 하시고 저의 작은 자아는 잊게 하소서.

 

사랑 안에서
좁고 조급한 생각의 우물을 벗어나 강물로 흐르게 하소서.
하여 가난과 비움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 안에서
영혼의 모든 힘이 당신을 향해 흘러 다시 되돌아오지 않게 하소서.
하여 당신 안에 온전히 침잠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제 마음의 과녁인 당신은
제 자신보다 오히려 제게 더 가까이 계시나이다.

 

당신을 사랑할 때, 저는 자아의 동그라미를 깨고

 

답변 없는 물음의 고통으로 멀어버린 제 눈이
멀리 보려 하지 않을 때,
당신께 다가갈 수 없는 눈부심으로 눈을 감아 버릴 때,

 

오, 헤아릴 수 없는 이여. 사랑의 문을 통과하여
제 생의 가장 깊은 곳에 당신이 오셨을 때,
그제야 저는 당신 안에 온전히 저를 묻을 수 있나이다.

 

오, 신비로우신 하느님,
그제야 저의 모든 의문들을 당신 안에 묻을 수 있나이다.

 

                                          - K. 라너 -

 


묵주기도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성모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 정겨웠던 나자렛 성가정에서의 생활, 희망에 찬 출가, 활기찼던 공생활, 연민과 사랑이 가득했던 착한 목자로서의 삶, 처절했던 십자가 죽음, 영광스런 부활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내적인 번민이나 슬픔, 상처나 고통이 천천히 치유되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묵주기도 안에서 또 다른 나자렛의 마리아가 되어 정성껏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다 보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성가 “당신의 넓은 날개를 펴고”

 

당신의 넓은 날개를 펴고
주님, 당신의 넓은 날개를
부드럽게 내 위로 펼치소서
당신 안에서 지친 이 내 몸을 온전히 쉬게 하소서

 

오, 나의 힘과 나의 부분, 나의 반석,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그리고 항상 당신의 은총 안에
살게 하소서

 

오, 나를 노아의 정화하는
홍수의 물로 씻어 주소서

 

나에게 기꺼운 마음과
깨끗하고 착한 마음을 주시고
크고 작은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해 주소서
우리가 편히 잠든 동안 우리 모두를 안아 주소서